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리스트/생애 (문단 편집) === 말년의 리스트 === || [[파일:external/www.pianostreet.com/liszt2.jpg|width=200]] || || 죽기 3년 전의 리스트 || 리스트의 마스터 클래스 영상 참고 [* 설명과 달리 리스트의 생전 영상이 아니라 'sceneggiato sulla vita di liszt' 라는 영화 중 일부를 속도와 화질을 편집한 것이다. 원본 링크 [[https://youtu.be/bjysebik-js]] 6:17 부터 ] [[https://youtu.be/DMJwfIxFWhw]] 하지만 천하의 리스트라도 노령에 이와 같은 강행군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겼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생기기 쉬웠다. 결국 70세가 되던 1881년, 그는 바이마르의 숙소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고 계단에서 쓰러졌다. 당시 그의 다리는 심하게 부어 있었는데, 다행히 의식은 회복했지만 다리의 움직임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이때 다리에 생긴 장애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 전문가들은 쓰러졌을 당시의 증상을 울혈성 심부전으로 진단하고 있다. ] 그간 건강했던 리스트는 이 때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약해졌으며 이후 천식, 불면증, 백내장, 심부전등 각종 노인성 질환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중생활은 당분간 계속되었다. 1886년 7월, 리스트는 딸의 주관으로 열린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관람한 후 감기증상을 호소하는데[* 상술한 각주에 서술되어 있듯 바그너와의 화해 이후로도 코지마와는 그녀의 냉대로 인해 제대로 된 화해를 이루지 못한 탓에, 리스트는 [[딸바보|주치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을 보기 위해 무리를 했다고...]]][* 원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주관은 바그너가 맡았는데 그가 1883년 사망한 후 아내 코지마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리스트는 회복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은 8월 3일에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바이로이트 시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폐렴이었다. 한편으로 "리스트가 얻은 감기는 목숨을 잃을 만큼 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엉터리 치료를 받는 바람에 오히려 증세가 악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1869년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나의 장례식은 되도록이면 화려하지 않고 간결하며 적은 비용으로 치뤄지길 강하게 바랍니다. [[조아키노 로시니|로시니]] 때 같은 장례식은 제 때는 싫기도 하고, 친구나 지인을 부르는 것조차 반대합니다. 화려함, 음악, 행렬, 쓸데없는 조명, 그리고 장례식마다 들어가는 그 어떤 추모연설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유해는 교회가 아니라면 어떤 묘지든 좋으니 그곳에 묻어주십시오. 거기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죽은 토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묘지가 아닌 곳에 묻히는 건 바라지 않고, 교구교회에서의 독송[[미사]] 이외의, 레퀴엠을 부르는 것도 포함해서 그 어떤 종교적 의식도 원하지 않습니다. 묘비에는 [[시편]] 140편의 이 부분을 새겨주십시오.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리스트는 1860년에 바이마르에서 유언을 세심하게 작성했으나, 어디에 묻히고 싶은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을 이장하는데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각 지역에서 리스트를 이장하려고 나섰는데, [[헝가리]]에서는 "리스트는 말년이 될수록 그의 고국이 헝가리라고 진심으로 믿었으므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가 리스트 최후의 안식처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했으며, [[바이마르]]의 카를 알렉산더 대공은 "리스트가 예전에 바이마르의 특별 카펠마이스터 시절에 남겨놓은 유품을 넣어, 지위에 걸맞게 위엄 있는 묘를 짓겠다"고 공언했다. 리스트의 출생지 라이딩에서도 유지들이 나름의 근거를 끊임 없이 설파했다. 코지마는 처음엔 부다페스트 이장에 대해 긍정적이었으나, 1887년 2월 헝가리 의회에서 이 제안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헝가리 총리는 리스트를 "'헝가리의 애국자'가 아니었다"고 표명했고 호의적인 제안이 묵살되자,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에 아버지의 묘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리스트는 지금까지도 바이로이트에 묻혀 있다. 한편 리스트와 헤어진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를 잊지 못했던 필생의 여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심한 충격에 빠졌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평생 멈추지 않았던 글쓰기도 중단했으며, 리스트가 사망한 지 8개월 만인 1887년 3월에 사망한다.[* 한편으로 그녀가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프란츠 리스트, version=813, paragraph=2)] [[분류:프란츠 리스트]][[분류:인물별/생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